‘영주 순흥 벽화고분 (사적)’은 순흥면 읍내리 비봉산 정상에서 서남방으로 뻗어 내린 구릉의 경사면에 자리 잡고 있다. 무덤방 (널방 玄室) 왼쪽 벽에 붙여 입구를 낸 횡혈식 석실묘다.
길이 202㎝, 너비 353㎝ 크기의 장방형 평면에 천장 높이는 205㎝이고, 입구의 문 높이는 70㎝가량 된다. 위로 갈수록 약간 좁힌 벽은 네모나게 가공한 돌을 쌓아 축조하였고 천장은 큰 판석으로 덮었다.
또한, 널방에는 시신을 두는 시상대(屍床臺)와 제단으로 보이는 대를 별도로 바닥보다 높게 쌓았다. 현존 벽화는 무덤을 지키는 역사상, 인물상, 새, 나무, 산, 연꽃과 구름무늬, 화염문양(또는 산악문양) 등이다. 안타깝게도 발견 당시 이미 도굴된 상태였으며 이로 인해 그림이 그려져 있는 석회면이 떨어져 나간 곳이 많다. 남아 있는 벽화를 통해 네 벽을 재구성해 보면 인물풍속도(人物風俗圖)를 주제로 삼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무덤방 안에서 발견된 인골(人骨)은 모두 9명이다. 무덤 주인을 안치한 시상대에는 무덤 주인으로 보이는 남자 1명과 여자 2명의 인골이 있었으며, 바닥에는 6명의 인골이 발견되었다. 무덤의 주인은 당시 이 지역에서 영향력이 큰 세력가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도굴로 인해 무덤 내부가 훼손되고 인골의 위치가 교란되었기에 본래의 위치를 찾기는 어렵다. 그렇지만 발견 당시 위치로 볼 때 시상대에는 무덤 주인과 가족이, 바닥에는 하인이 안치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는 순장과도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 시대 순장은 삼국사기 기록에 따르면 지증왕 대에 금지된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하면 신라에서는 지증왕 3년(502년) 봄, 2월에 영 令을 내려 순장(殉葬)을 금지했다고 한다(下令禁殉葬). 그러면서 그 이전에는 국왕이 죽으면 남녀 각 다섯 명씩을 죽여서 함께 묻었다(國王薨, 則殉以男女各五人)고 덧붙였다.